멋진 사람들
메르헨에세이 - 정해찬님
섭소천
2005. 12. 27. 01:41
나는 코스모스를 그리기가 싫었다. 그러나 또하나의 모순은 그꽃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 애증이 섞인 꽃에 대해 도대체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마치 그 꽃은 비극적 상황 속의 눈물같은 위로의 꽃이었다. 애시당초 비극이나 불행이 나에게 존재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꼭 그런 바보 같은 상황에 놓여 있을 때 그 꽃이 그 자리에 있었다. 가녀린 줄기에 소박하면서도 서글픈 엷은 핑크색을 하고서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화려한 슬픔을 보고 있노라면, 비극 속에서 웃고 있는 척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 몰골을 있는 그대로 흉내내고 있는 것 같아서 독하게 참고 있는 나를 늘 울게 만드는 그런 꽃이었다.
그러니까 고 3때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내놓은 애들과 깡패짓을 일삼고 몰려다니며 공부는 아예 안하고 술담배만 하고 다니던 때의 일이었다. 기말고사니 월말고사니 하는 유치한 고등학생의 내신등급제를 '밀가루 포대 마냥 등급을 정하다니!'하면서 고의적으로 학교를 빼먹었다. 미술대학은 죽어도 못보내겠다던 아버지와의 싸움과 가난한 집안 환경의 지겨움, 그리고 당시 성적에 목을 매는 학교의 분위기에 나는 꿈을 완전히 잊고 불행 속에서 미리 낡아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늘 자살을 꿈꾸었었고 그 자살의 장소로 학교 뒤 경계선인 코스모스 밭을 택했다. 그리고는 수시로 틈만 나면 그곳에서 멍하니 꽃만 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점심시간을 틈타 그곳에 간 나는 무슨 생각에선지 코스모스를 하나씩 따서 화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줄기를 엮어 머리에 얹고, 팔에도 묶고, 교복 주머니에도 꽂았다.
잠시 후, 멀리서 5교시가 시작되는 벨소리가 들려왔다. 아차싶어 뛰었지만 게으른 학생을 잡겠다는 수학 선생님에게 걸린 나와 나머지 다섯명은 뒷문이 아닌, 앞문으로 들어가야 했다. 아이들은 나를 보더니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수학선생님은 정신나간 애를 보는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너 어디 이상한애 아냐? 머리에 그 꽃은 뭐냐?"
나는 재빨리 머리 위와 교복에 꽂은 꽃들을 빨리 수습하려 했지만 잔인한 수학 선생은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그대로 거기 서있다가 교무실로 따라와!" 그뒤, 나는 교무실의 선생님들과 고3 전체에 이상한 애로 소문이 나서 철저히 외면 당하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딱 한번 복도에서 마주친 나이든 국어 선생님의 애정어린 미소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여학생들도 안하는 짓을 네가 했다면서? 넌 정말 감성이 풍부한 좋은 화가가 될꺼야."
코스모스가 다 져버린 어두운 구석의 학교 울타리에서 나는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니다, 난 아무것도 되지 않을거다.' 그때 통곡처럼 쏟아낸 그 울음은 늦가을의 코스모스가 다 먹어주었다. 그 암담한 현실과 벽속의 눈물 그리고 미래의 불안까지도...
글, 정해찬 [일러스트레이터]
위의 아름다운 그림들은 모두 현재 발행되어 있는 일러스트집 '메르헨에세이'와 '환상'에서 출처한 그림들입니다.
더 좋은 그림들도 많이 있지만 아직 판매되고 있는 출간물이라서 많이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럼 즐감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