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뉴스에 보니 또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 죽도라고 우겼단다.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지만 이래저래 동계올림픽까지 소치에 넘겨준 다음이라 그런지 울화가 치민다. 도대체 우리의 국권(國權)은 어디에 있으며, 지난 세월 역사 속에서 만인의 우두머리로 권좌에 앉아 있는 대로 목에 힘을 주던 분들은 다 무엇을 했단 말인가? 독도수비대를 결성해 그 외로운 섬을 지키고, 주민등록을 옮겨가면서 까지 독도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기는 할까? 매번 일이 터질 때마다 독도가 어쩌고저쩌고 해대는 금배지 단 분들은 다 어디로 가서 무슨 인기성 발언 하나 만들려고 궁리들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요즈음 대권도전으로 저마다 손익계산에 분주하셔서 아마 독도 문제에 정신을 쓸 겨를이 없는가보다.
이참에 독도의 역사에 대해서 일본인들에게 좀 알려주고 싶다. 작은 섬나라에서 좀스럽게 살아가던 나라가 언제인가 화력을 갖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안하무인이라니. 그런데도 말 한마디 못하고 매번 질질 끌려만 다니시는 분들도 함께 공부 좀 했으면 한다.
☞ 512년 6월(신라 22대 지증왕 13년) / 지금의 울릉도를 본도(本島)로 하고 독도로 인정되는 우산도(于山島)를 작은 섬으로 하는 우산국(于山國)이라는 하나의 독립국(獨立國)이 있었다. 신라 22대 지증왕은 아슬라주(阿瑟羅州) 군주(君主)로 이찬 벼슬에 있던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정복케 하였으며, 이사부는 나무로 만든 목우사자(木偶獅子)라는 무기를 써서 우산국을 정복한 뒤 6월에 신라에 귀속시켰다. 그 뒤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다.
☞ 930년(고려 태조 13년) / 고려 태조13년 우릉도(지금의 울릉도)에서 사절로 백길, 토두 두 사람을 보내어 조정에 공물을 바쳤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 백길에게는 정위, 토두에게는 정조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 때가 고려 태조 왕건이 길창(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을 무찌른 해이다.
☞ 1018년(고려8대 현종 9년) / (우산국이) 동여진의 침략을 받아 항복하였으나, 곧 조정에서 이완구를 시켜 피난민을 우산국으로 돌려보내고 농기구와 이물품을 전달하였다.
☞ 1022년(고려8대 현종 13년) / 동여진의 침입으로 살기가 힘들어진 백성들에게 이주를 허락해 예주에 살도록 했다.
☞ 1132년(고려 17대 인종 10년) / 울릉도 독도에서 조정에 공물을 바쳤다.
☞ 1132년(고려 17대 인종 10년) / 우산국대신의 이름이 우릉(于陵 또는 羽陵)이라고 바뀌고, 우산국주(宇山國國) 대신 우릉성주로(于陵城主)로 바꾸었다. 이는 우릉도와 우산도(독도)로 구성된 우산국이 완전히 중앙정부의 직할아래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 1141년(고려 17대 인종 19년) / 강원도인 명주도 감창사(溟州道 嵌倉使) 이양실이 울릉도에 사람을 보내, 본토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과실과 나뭇잎을 채취하여 조정에 바쳤다.
☞ 1157년(고려 의종 11년) / 명주도 전중내급사 김유림을 파견하여, 섬의 중앙 꼭대기 (지금의 성인봉)에서 동으로 1만 여보, 서로 1만3천 여보, 남으로 1만 5천 여보, 북쪽으로 8천 여보에 달한다는 측량보고서와, 마을 7군데가 있다고 보고를 하였다..
☞ 1197년(고려 명종 27년) / 동쪽지역으로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였으나, 풍파가 심하여 다시 서쪽으로 이주.하였다.
☞ 1242년(고려 고종 29년) / 최이에 의하여 울릉도 이민 사업 실시를 하였으나, 풍랑 등으로 인해 시민사업이 실패를 거듭했다.
☞ 1416년(태종 16년) / 울릉도에는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비워두는, 공도 정책을 발표했다.
☞ 1417년(태종 17년) / 삼척사람 김인우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임명하여, 울릉도에 파견하였다. 15호 86가구 주민이 있음을 발견하였으며, 3명만을 관할하는 안무사에게 설득되어 육지로 옮겼다. 여기서 우릉도를 공도정책으로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한 이유 중에 주목할 점은 「강원도에서 무릉도까지 풍랑 속의 머나먼 뱃길로 수장될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 무릉도에 와서 사람이 살게 된데는, 고려 말 나라의 부패와 정권의 불안정으로 가혹한 세금과 부역을 피하여 이곳으로 왔기 때문이란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 1438년(세종 20년) /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도 공도정책을 계승하였다. 김인우를 역시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파견하였으며, 여기서 우산무릉등처란 섬이 우산도와 무릉도등 2개가 있다는 표현이 분명하다.
☞ 1441년(세종 23년) / 울진 사람의 남회와 조민을 무릉도순찰경차관으로 파견하였으며, 남녀 66명을 수색하여 본토로 송환하였다. 이는 본국을 모배한 죄로, 주모자 김안은 교수형을 당하고, 나머지는 노복으로 삼았다.
☞ 요도/신도설 / 만호 남호에게 울릉도 수색을 지시하였으며, 70여명을 송환하였다, 공도정책 계속 이후 울릉도 독도에는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았던지, 육지와 몇 년 동안 소식이 두절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공도가 된 후 사람들이 항해 중, 울릉도(무릉도), 독도(우산도)를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래서 새로 생긴 섬이란 신도설과 지금으로 보면 유령 섬의 일종이라는 요도섬이라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 삼봉도 / 강원도 울진현조에 보면 우산과 무릉의 두 섬이 울진현 바다 한가운데 있는데, 두 섬의 거리가 멀지 않아 맑은 날에는 바라볼 수도 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의 뒤를 이은 성종 때도 해안주민들 사이에 강원도 경내에 속하는 동해 한 가운데에 삼봉도가 있다고 하였다. 부역이나 세금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어갔다.
☞ 성종실록 / 조정에서 파견된 강차관과 박종원이 삼봉도에 다녀왔다는 김환경과 함께 삼봉도를 수색했으나 실패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삼봉도는 독도이다.
.☞ 1531년(중종 26년) / 김자주의 삼봉도(독도) 묘사 기록을 보면, 25일에 섬 서쪽 7∼8리 남짓한 거리에 정박하고 바라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나란히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이 있가. 하나는 중도이고 중도 서쪽에도 작은 섬이 있는데, 그 모두가 바닷물과 통한다.
☞ 1693년(숙종 19년) / 『신증동국여지승람』의 45권 울진현군에 보면, 우산도와 울릉도 두 섬은 울진현 정동에 있다. 우산도는 세봉우리가 하늘로 곧게 솟았으며, 남쪽봉우리가 약간 낮다. 날씨가 맑으면(울릉도에서) 세봉우리가 위의 나무와 산 밑의 모래톱이 역력히 보이고 바람이 잦아지면 이틀에 도착할 수 있다.『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독도에 관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은「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입증하는 확고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무척 중요하다.
이를 보면 신라 지증왕 13년 이래, 세종실록 지리지,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까지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일관되게 나타내고 있음은 독도가 우리영토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 1693년(숙종 19년) / 대마도주가 동래부로 서계를 보내왔다. 조선 어민의 죽도 출어금지를 요청하는, 조정에서는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하는 회신을 보냈으며, 영의정 남구만을 형세조사차 삼척첨사를 울릉도에 파견하여 안용복, 박어둔 등 40여명의 조선어부는 울릉도, 독도에서 조업중인 일본 어선 발견하고 추방을 위한 격투를 벌였다. (독도 사수 - 안용복 장군편 참조)
☞ 1697년 2월(숙종25년)「신증동국여지승람권에는 일본의 도쿠카와 막부는 대마도주로 하여금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불법월경을 스스로 금지시키겠다는 서계를 보내었다. 일본 도쿠카와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를 두고 ‘두 섬은 조선의 영토’라는 서계를 휘하의 관백과 태수에게 쓰게 했을 만큼 독도의 조선 영유권 존중하였다. 조정은 울릉도 수토제도를 채택하고, 3년에 한번 씩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에 관원을 보내 순검케하였다·.
☞ 1699년(숙종 25년) / 일본 막부가 독도는 조선영토임을 공식인정하였다.
☞ 1900년 10월 25일(고종 37년) / 안용복 장군은 일본 에도 막부(정부)로부터 울릉도. 독도가 조선 땅임을 인정하는 증서를 받았다.
☞ 1904년 8월 23일(고종 41년) / 칙령 제 4호 울릉도는 울도로 개칭하고, 강원도는 울진현에 속해있던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를 묶어서 하나의 독립군으로 설치하면서, 군청관할 구역을 울릉전도와 죽도 및 석도라고 못 박았다. 여기서 죽도하고 하는 섬은 울릉도 섬목 앞의 실제 죽도이다.
☞ 1905년 5월 17일(고종 49년) / 조일 의정서에 의거하여, 독도에 일본 해군 부대를 설치하였다.
☞ 1905년 11월 17일(고종 49년) / 일본 정부는 독도를 죽도라 변칭하고, 시네마현 토지대장에 기재하고 일방적으로 일본 영토에 합병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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