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깨작깨작

The Gift

섭소천 2008. 12. 25. 16:19

 

어제 나는 그리운 초등학교에 오르는 계단을 올랐고 그 시절 그랬듯이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넓은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나란히 서 있던 동상옆에 서서 그들의 눈동자가 움직이는지 한참을 바라보기도 했다.

전쟁때 죽은 사람을 파묻어서 엄청나게 커졌다는 소문이 도는 커다란 나무밑에 앉아 울창한 나뭇잎을 올려다보며 그 사이로 비치는 햇빛에 눈부셔했다.

학교 뒷길로 나가 조금 더 걷다보면 나오는 산에 올라 아카시아와 라일락향기의 진한 향기에 황홀해하며 약수터에 가서 달고 맛있는 약수 한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지는 해를 바라보자니 어느 덧 나는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하교길에 서있었다.

 

당시 미쳐있었던 The Sound of Music에 나오는 랜들러 춤을 짝을 맞춰 춰가면서 친구들과 밝게 웃었다.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친구들 사이에선 키가 큰편이라 내가 남자역할을 맡았지만 언젠가는 'I'm Seventeen'을 함께 해줄 멋진 남자친구를 동경하기도 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분식집에 들러 먹던 떡볶이,라면...엄청 매웠던 떡볶이를 먹고서는 허겁지겁 물을 마시는데 어느새 익사해있던 파리의 주검을 보고서는 화장실로 달려가 개워내고 나와보니 어느덧 대학합격자 발표후 조심스럽게 마셔본 첫 술자리였다.

 

당시에는 ARS로 대학합격자발표를 했는데도 궂이 합격자명단을 보러 학교에 가기도 했었다.

이제는 내 세상이 왔다면서 '덤벼라, 세상아, 내가 멋지게 살아주마'하고 기세등등했었다.

처음으로 시끌법적한 Bar에 들어가 밥값보다 비싼 칵테일을 마셔보기도 했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들하고 싸움도 했다.

처음으로 경찰서에서 떨리던 손으로 진술서를 쓰려고 펜을 드니 어느 덧 군대에 간 남자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100일 휴가를 얼마 안남겨둔 4월의 어느 날이었다.

첫 휴가 그의 집에서 그의 어머니와 함께 음식을 만들고 언제쯤 그가 올지 가슴 설레여하며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그를 마중나간다며 그의 집앞 큰길로 나가다가 군복을 입은 낯선 그와 마주치던 순간,

우리는 활짝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봄의 햇살보다 더 따뜻하고 눈부신 날이었다.

짧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던 날 그의 부대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 적성에서 동두천으로 향하는 버스안에서 눈물을 흘리다보니 어느 덧 그와 헤어져 실연의 아픔을 숨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안에서 차창밖을 바라보며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김서린 창가밖의 풍경들이 눈물때문에 더 뿌옇게 되어버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주위 사람들이 볼까 흐느낌을 죽이며 눈물을 되삼키려 살며시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뜨니

집으로 돌아와 창문밖으로 석양이 지는 한강을 바라보며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내 코끝을 간지럽혔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그 누구도 그립지 않았고 바람이 바람으로 닿았던 그때 처음으로 행복하다고 느꼈다.

그 기분이 너무 좋아서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선 눈을 감고 창문틀에 가만히 팔에 기대어 머리를 눕히고 바람을 느끼면서 미소지었다.

 

 

언제부턴가 아무것도 특별할 거 없던 크리스마스에 난 주마등 같은 꿈을 꾸었다.^^;;

인생의 마지막에 보인다던 주마등... 그것이 어쩌면 삶의 끝을 앞둔 사람에게 주는 신의 최고의 선물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픈 기억도 좋은 기억도 이제 뒤돌아보니 그저 '좋았다.'

이제 헤메지말고 좀 더 열심히 살라고 신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피식하고 웃었다.

이런 꿈같지 않은 인생극장하이라이트를 보는 듯한 꿈을 꾸는 경험은 아무래도 쉽지 않을테니 말이다.

실컷 한잠을 자고 난 후 새로 태어난 듯한 느낌이 들어 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다. 

 

とにかくみんな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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